설교제목 : 자라게 하려 함이라
설교본문 : 베드로전서 2장 1절 ~ 2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3년 04월 16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오늘 본문은 우리 믿는 자들의 성숙한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 믿는데 그냥 믿으면 되는 게 아니고 정말 잘 믿어야 된다는 것을 가장 뼈저리게 깨달았던 대표적인 제자는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고, 영적 다운에 쉽게 빠졌던 베드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는 우리가 믿을 때 잘 믿어야 한다는 것, 곧 성숙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 후서를 끝마치는 마지막 절인 베드로후서 3:18절에서도 이렇게 당부합니다. “(벧후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자라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베드로는 믿음의 성장을 위해 궤휼과 외식, 시기와 비방을 포함한 “악독”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려면?
1. 버리고 사모해야 합니다(1-2절).
① 기만과 외식을 버리십시오 : 오늘 말씀은 모든 기만과 외식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만을 개역성경에서는 ‘궤휼’이라고 말하는데, ‘궤휼’이란 말은 한글로 쓰기도 어려운 말이지만 한자로는 더 어렵습니다. ‘궤’는 과거를 부추겨서 나쁜 짓을 하게 한다는 의미로 교사(敎唆)할 ‘궤(詭)자’이고 ‘휼’은 속일 ‘휼(譎)자’입니다. 그래서 궤휼은 속인다는 두 마디가 합쳐진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 속임수인 것입니다. “외식”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 생각과 행동,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 가정 생활과 직장생활의 불일치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안그런 척, 안그러면서도 그런 척 한다는 것입니다(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딤전 4:2). 베드로가 외식이란 말을 했을 때 아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그토록 비판하셨던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겉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했지만, 속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회칠한 무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 속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하는데 속이 비고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어서, 꽤 괜찮아 보이는 겉모습으로 지금 속의 더러운 것을 가리고자 하고 있지 않습니까?
② 시기와 비방을 버리십시오 : “시기”는 내가 가지기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부러워해서 속으로 그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시기는 신약 성경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행했던 옛 생활의 특징으로 자주 나타납니다.(롬 1:29, 갈 5:21,26, 빌 1:15, 딤전 6:4, 딛 3:3). 또한 시기는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준 자들의 악한 동기 중에 하나였습니다(마 27:18, 막 15:10). “비방하는 말”은 누구를 거스려서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주로 남이 없을 때에 남의 약점이나 결점을 들어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뒤통수를 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려면 궤휼과 외식, 시기와 비방의 모든 악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2.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시 1:1-2).
그런데 무엇인가 기만하는 것은 그것으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그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기만하고 속이고 악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기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람과 나를 보고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떤 칭찬, 여러 가지 그런 것들 때문에 시기하게 됩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시기라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누가 못 되면 고소해 하면 그것이 과연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 의인의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길을 가고자 하는 곳에 내가 나를 두게 되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어떤 것들을 계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들 가운데 계속 있으면 그것이 결국 여러분을 죄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상의 길 가운데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나도 모르게 그들 가운데 죄에 타협하고 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연약함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로 가는 그 길에 서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그 길에 이미 섰기에 그렇기 때문에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유혹에 넘어갔다라기 보다는 유혹에 넘어가고 싶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더 맞는 얘기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의 자리가 따로 있고 겸손한 자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 우리가 탐심을 가지면 우리는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 가지 못했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하고 자기를 비하하고 그러다가 그 자리에 딱 서게 되면 그 자리에 서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내려보고 깔보는 그것이 오만한 사람이 되는 길에 서는 것입니다. 따로 그런 자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집착하고 길에 매이고 어떤 꾀를 생각하려고 할 때 결국 그것이 죄인의 길이 되는 것이고 오만한 자의 자리가 되는 것이고 악한 사람의 꾀에 넘어가는 삶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려면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적용 : 여러분의 믿음의 자리들을 한번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계시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것들을 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얘기하면서도 기도 제목이 많은데 그 기도 제목들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만큼 우리의 마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아직 미성숙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응답을 받으므로 우리가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입니다(진리). 응답 받아서 내 삶의 여러 가지 것들을 전리품처럼 얻는 것(보상)이 성숙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랄수록 다른 사람을 용납하게 되고, 용서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목양).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점점 더 하나님만 알아가게 되어지는 믿음이 자라가는 과정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는 고통이 아니라 세상에서부터 멀어지는 성숙함을 깨닫는 것이 구원에 이르면서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고, 성경대로 그렇게 여기고,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성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 세상의 문제들 가운데에서 너무 많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굉장히 간단하고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 해결 받을 수 있는 우리 소중한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