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설교본문 : 사도행전 4장 12절 ~ 14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3년 12월 10일
설교요약 :
세계적인 신학자이자 설교가인 존 스토트(John Stott)가 쓴 저서 중에 「전도하지 않는 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복음이 주장하는 대로 기쁜 소식이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존 스토트가 태어난 영국은 이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아니라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윌리엄 케리(William Carrey)와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던 나라의 복음화율이 7%도 안 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침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대교인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복음 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조롱과 핍박을 당해도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자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잡아 가두고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인생 여정에서 해답이 됩니까?
1. 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당시 모든 권력을 잡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들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 없는 범인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식쟁이였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들은 그렇게 담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누군가 자기를 알아볼까봐 두려워 몰래 뜰로 숨어 들어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을까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에도 복음전파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종종 다투곤 했습니다.그런데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랬던 사람들이 지금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안일함과 야망을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삶이 변화되는 모습 때문입니다.
어떻게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변화된 모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도 제자들의 모습을 볼 때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비난하고 싶은데 비난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해도 베드로와 요한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무식쟁이였고 소심하고 겁쟁이였던 그들이 변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변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분명한 변화를 부인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민으면 삶이 변화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생명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술과 담배를 끊는 정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변화된 것처럼 완전한 변화, 그들을 비난하려고 비난거리를 찾는 종교지도자들조차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화된 모습, 그러한 변화된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어디서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의 변화는 우리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타 종교가 인간의 노력으로 자신을 선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길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역사로 변화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람들을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변화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일요일에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머지 6일은 자신의 뜻대로 사는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 교제하다가 돌아가 나머지 요일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입니다.
적용 : 예수님이 해답이십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 가운데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성령님이 임하시는 새로운 삶, 의미 있는 삶,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님은 미국 텍사스 남감리교회의 독실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907년 9월에 남감리교회 여자외국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조선에 왔고, 개성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만일 나에게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녀가 죽기 전 부모님께 보낸 한통의 편지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비 켄드릭 선교사가 왜 그 젊은 나이에 자신의 조국이 아닌 복음을 알지 못했던 조선 땅에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사랑, 바로 복음 때문 아니었을까요? 곧 예수님이 해답이시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