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이만한 믿음의 기도
설교본문 : 마태복음 8장 10절 ~ 13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3년 10월 15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오늘 본문에 믿음과 아름다운 인격으로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이방 군대장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만난 신앙인 가운데 최고라고 기뻐하십니다. 이방인은 물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감탄하셨습니다. 그의 신앙과 태도가 어떠했길래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이만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은 더 큰 감동으로 여러분에게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만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1.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홉 구절(5절-13절) 안에는 특이하게도 “이르되”라는 말이 6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아홉 구절(5절-13절) 가운데 첫 번째절 5절(8:5)을 제외하고 나면 6절 7절 8절 9절 10절 11절 12절 13절 – 여덟 절이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로 이루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5절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기도합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 마을에 점령군 사령관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100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중대장급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 당시는 전체 군사통치 시절입니다. 이런 때의 군인의 권위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6절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에 걸렸는데 몹시도 괴로워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사실은 의문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서술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의문문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보면 이것은 의문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맞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련? 날 보고 가서 고쳐 달라고? 이런 이야기입니다. 8절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여 고쳐주십시오. 권위 있는 예수님께서 어찌 죄인된 우리 집에 들어오겠습니까? 유대인인 당신께서 어떻게 율례를 어기고 이방인인 우리 집에 오시겠습니까? 괜히 구설수에 올라서 당신에게 불편을 드릴까 제가 조심스럽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대단히 놀랍게 여기시며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13절에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말씀하신 바로 그때 하인이 나으니라! 여기까지가 본문의 대략적인 내용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이만한 믿음」입니다. 오늘 설교 전체를 바라보는 하나의 안경,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꿰는 핵심 키워드가 있다면 「이만한 믿음」입니다. 최상급 신앙을 말합니다. 믿음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한번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본문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메갈레 피스티스」로 메가톤급 믿음보다 더 큰 최상급입니다. 이만한 믿음은 하나님도 감동할만한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 가나안 여인에게 말씀하신 ‘메가톤급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이만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만한 믿음은 백부장의 믿음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함께 하나됨으로 교회를 세우도록 하십니다.
본문이 말하는 「이만한 믿음」이 무엇일까요? 우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라는 본문 내용에 힌트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방인인데, 어릴 때부터 모세의 율법을 공부해 온 사람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회당에서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좋은 신앙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나 장로의 신앙도 아니고, 모태 신앙도 아닌데 평신도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귀한 믿음을 가졌다니 놀랍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기도 전에 벌써 예수님의 소식 곧 복음의 소식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이 이방인에게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태는 매우 행복해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마태의 흥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관점 하나가 있습니다. 마지막장 28장 19-20절 결론을 앞으로 가져와서 마태 전체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방인 족속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길 원했던 마태의 관점을 제일 앞으로 끌고 와서 마태복음을 보지 않으면 마태복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을 설레게 한 사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최근 여러분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평생 살아가며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는 이방인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대단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동이 저자 마태의 감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감동은 구원받는 감동이요 복음이 전해지는 기쁨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동, 더 큰 역사는 없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천국의 심장입니다. 오늘 본문 11절 12절에 보면 마태는 자신의 교회에 이미 이방 선교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1절 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네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마태의 특징어입니다. 마태복음에 상당히 자주 나타납니다.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이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태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동참하지 못하는 비극을 몸소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이방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예수님에 대한 주권과 경외감을 가진 바로 이 사건이 마태를 흥분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지만 하나됨으로 교회를 함께 세워갈 때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 성도에게 이것보다 더 큰 영광,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적용 : 이만한 믿음은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호칭을 주여! 즉,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물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벌써 이해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무명랍비로 여겨진 예수님께서 당시 로마 장교 백부장의 초대를 받았다면 누가 더 영광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백부장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예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처럼 귀하신 분이 천한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처럼 존귀하신 분이 미천하고 무가치한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신같은 분이 이방인인 더러운 우리집에 오는 것을 나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만큼 겸손한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고 얘기해 주십니다. 백부장의 겸손한 인격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에는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인격에 믿음까지 더해졌으니까 이만한 겸손을 지닌 믿음을 내가 본 적이 없다는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경외감 때문에 “나는 부족합니다.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주님께 구하는 것이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이만한 믿음의 기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