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진쉼을 위한 처방전
설교본문 : 마태복음 11장 28절 ~ 30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3년 09월 03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쁘면 쉽게 나쁘게 변합니다. 조급한 영혼, 바쁜 영혼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흑암의 세력들은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 수 없을 때는 바쁘게 만듭니다. 바쁘게 만들면 스스로 나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된 쉼(진쉼)을 얻기를 원하십니까? 이를 위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 강조점을 전하고 있습니다. 진쉼을 위한 주님의 처방전은 나를 알고, 주님을 알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참된 쉼(진쉼)을 위한 처방전은?
1.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입니다.
우리 형편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수고하고’라는 단어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지치다라는 의미가 있고, 감성적으로 낙담되어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러한 상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언제 내려놓을지 모를 짐을 안고 끊임없이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 짐은 언제부터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 졌습니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이후부터 우리의 어깨에는 그 짐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이후부터 모두가 이 죄 짐을 안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이후에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수고하는데 수고한 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땅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많은 수고를 했다고 많은 수확물을 반드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뿌렸는데 한두 가지도 못 거둘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인간의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짐보다 가장 무거운 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장 큰 짐은 바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참다운 평화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주어도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부터 쉬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장을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6일째 인간을 만드십니다. 인간이 만들어지고 그다음 날 주어진 것이 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내가 너의 영혼의 아버지가 되어 너의 삶을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믿음이 있으면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안식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에 따라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본문의 두 번째 강조점은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기에 그분이 안식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할 때 답은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깨어진 그 쉼과 안식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온유는 친절하거나 너그러운 태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십니다. 그리고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분에게 나오면 그분은 그 모든 사람들을 전부 다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온유와 겸손을 언급하면 이것은 사람을 향한 성품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유대인의 문화적 인식이 그렇습니다.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할 때 그들이 바로 율법을 떠올리듯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는 표현을 말하면 그들은 사람을 향한 성품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성품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명언집을 살피고 좋은 여행지를 찾지 않아도 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예수님께로 나오면 우리의 모든 죄 짐이 벗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게 안식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나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모습이 보여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소나 나귀의 어깨에 멍에를 메게 합니다. 그리고 밭을 일구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통 한 마리의 소는 어미 소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아기 송아지입니다. 둘은 한 멍에를 메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멍에는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절대로 벗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벗겼다가 다시 메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 번 멍에를 메면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메는 것입니다. 쉴 때도 멍에를 메고 서서 쉬게 합니다. 한 마리가 앉고 한 마리는 서 있으면 서로에게 고통이기 때문에 둘이 동시에 서서 일이 끝나고 다시 우리 안에 들어가서 쉼을 가질 때까지 멍에를 함께 메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고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말했던 율법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벗고 이제 나의 멍에를 메라는 것은 ‘이제부터는 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벗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613가지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정신이 하나로 들어가 있는 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라는 것입니다(풍성한 삶). 그런데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차이점은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율법들을 상기시켜주지만 함께 메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의 특징은 그 멍에를 함께 어깨에 짊어지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멍에는 우리 인생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멍에를 벗는다는 것은 결혼 생활, 재정 문제, 가정 문제, 노후 문제, 위기 관리, 자녀 교육, 갈등 해결, 아픔과 상처 등의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주님의 가르침을 우리 삶으로 받아 들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무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함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적용 : ‘닭에게 날개는 짐이지만 독수리에게 날개는 자유를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날개인데 누군가에게는 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높은 곳을 날 수 있게 만드는 날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를 가벼이 여기고 기쁨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 놀라운 축복의 삶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메어야 될 멍에는 주님의 멍에이지 종의 멍에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진쉼을 누리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을 짓누르고 있던 그 모든 짐들이 벗겨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의 삶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