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
설교본문 : 창세기 6장 14절 ~ 16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3년 08월 06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노아의 방주는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직 위로 열린 창문, 하늘만 보이는 창문을 통해서 노아와 그 식구들은 하늘만 바라봄으로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 위로와 소망, 새 힘이 넘칩니다. 만일 옆으로 낸 창문이 있었다면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대홍수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근심, 걱정이 몰려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끝없이 불안,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옆에 창문이 달려 있어서, 세상을 향해 창문이 열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 열린 창문을 닫아야 합니다. 환난의 홍수, 시험의 파도가 몰려올 때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나 느낌에 속지 말고 주님의 말씀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믿음의 눈으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노아의 방주는 돛과 노와 닻이 없는 배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면서 주신 설계도는 예상 외로 간단합니다. 크기와 형태에 관해서 설명하신 것이 전부입니다. 노아에게 배를 훌륭하게 몰고 가는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120년간의 수고로 배를 만들게 하시면서 상식적이지 않은 모양의 배를 짓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전진을 위한, 그리고 항해를 위한 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타고 있었던 375일 동안 노아가 배의 운항이나 정박을 위해 취한 행동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물에 떠올랐고 움직였으며 아라랏산 꼭대기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의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때는 그것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 1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방주를 완성한 뒤 대홍수를 앞두고 방주에 오르자 그 문을 닫아주시며 끝까지 책임져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명을 받은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동행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헌신의 시작은?
1. ‘나를 위하여’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14절).
노아 시대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노아 때 땅에 죄악이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실망하셔서 마음에 근심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하고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인류를 다 심판해서 없애고자 하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아라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완전한 자이고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이렇게 적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명령하십니다. ‘내가 이제 이 땅을 심판하려고 하니까 너는 이제 너를 위하여 배를 만들어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헌신의 시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헌신 그러면 헌신하는 사람이 헌신을 받는 사람에 대한 어떤 일방적인 관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너를 위하여 배를 만들어라. 아주 큰 배를 만드는데 너희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물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그런 큰 배를 만들어라.’ 그것도 기약 없이 지내야 되고 비가 사십일을 내리쳐서 지면에서 비가 마르기까지 거의 일 년 동안 배에서 지내야 했던 배였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그 모든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준행하며 헌신하며 만들었던 그런 일들은 결국 어떠한 결과로 다가옵니까? 방주가 지어졌는데 그 방주가 하나님이 비가 오실 때 계실 곳입니까? 하나님이 비를 내리실 때 타시려고 만들려고 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 방주에는 나무 하나, 공간 하나도 하나님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공간과 그 모든 노력과 수고는 절대적으로 노아의 생명을 위한 공간이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헌신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으로 주신 헌신은 나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힘쓰고 우리가 애쓰고 우리가 땀 흘리고 우리가 고생하는 것 같지만 그 고생과 땀 흘림이 우리에게 생명을 구함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을 바라보는 ‘창문을 내야’ 합니다(16절).
또 헌신을 명하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가득한 이 땅을 그냥 멸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 멸하시고 새롭게 만드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 의로운 노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물로 순식간에 다 휩쓸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 온전한 노아를 살리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에게 있었습니다. 헌신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합니다. 그리고 그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은 또 다른 생명체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노아에게 굉장히 무겁고 어렵지만 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고, 창문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처음에 들으면 정말 까마득한 얘기이겠지만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우리를 향한 긍휼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생명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헌신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헌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긍휼의 자리인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헌신은 그런 사랑의 흔적이자 또한 사랑의 결정체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헌신을 어떻게 보면 정말 힘들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낳고 돌보고 키우고 하는 모든 과정들이 힘들고 어려워 보이지만 그 헌신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게 됩니까? 힘들고 어렵지만 어떻게 보면 부모도 자녀에게서 삶의 이유를 얻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자리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헌신의 자리는 단순히 자기 힘만 빼고 자기 시간을 낭비하는 시간들이 아니라 그 헌신의 시간들을 통하여 부모도 영적으로 자라고, 마음이 넓어지고, 부모가 오히려 삶의 이유를 얻고 부모가 더 큰 사랑의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그러한 능력이 그 헌신 안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주님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헌신을 통해 주님이 채우시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적용 : 오늘 그런 헌신의 시작을 노아를 통해 보게 됩니다. 헌신은 ①‘나를 위하여’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14절). ② 주님을 바라보는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16절). 그런 헌신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나의 눈앞의 이익과 유익 때문에 그 헌신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과정과 같이 생명의 길, 긍휼을 입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헌신을 통하여 누군가를 살리고 그 누군가를 살리는 것은 그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살리는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헌신을 통한 하나님의 생명과 긍휼의 말씀이 우리에게 깨달아지는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