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날 사랑하심에 더 사랑함으로
설교본문 : 요한복음 21장 17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2년 04월 24일
설교요약 :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언제나 우리 마음과 삶에서 계속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심리학자가 미국대학의 사무행정직원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동일한 행정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자기 일을 소명(召命)으로 여기는 사람과, 단순히 생계수단인 생업(生業)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답니다. 두 부류의 차이는 놀라웠습니다.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며, 세상에 무언가를 기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생업으로 생각하는 이들보다 ‘즐거움과 만족감’이 훨씬 더 컸다는 겁니다. 반면에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보수가 많으면 일자리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생계수단이라는 점 이외에는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두 부류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습니다. 결국 ‘일에 대한 의미를 찾았는지 여부가 자신의 행복감과 직결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번 만난 후에 어떠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 하면 ‘예전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바닷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 깨끗이 회개했냐? 너 부인하고 난 다음에 많이 울었냐? 얼마나 많이 회개했냐?” 그런 걸 물으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니가 나를 많이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많이 사랑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사역을 이제 그 제자들에게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1. 날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기 때문에 자격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내 인생은 정말 가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내가 받은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내 죄의 크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만큼의 큰 죄인인 동시에 예수님이 날 위해 죽으실 만큼 한없는 큰 사랑을 내가 받았습니다. 이 사실 가운데 내 가치, 내 미래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그 일들에 맞는 조건들을 따집니다. 어떤 일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일들에 맞는 조건들을 우리가 갖고 있는지를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일들도 그렇게 조건을 살피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일들,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따지는 조건이 많겠는가? 라고 우리는 자연스레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자격들을 깎으면서 나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은 분명히 얘기하십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일 놀라운 창조주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기에 있어서 내가 너희들에게 원하는 게 뭔지 아느냐?’ 다른 조건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조건만 채워진다면 나는 너에게 나의 일을 맡기겠다’라는 음성에 우리는 반응(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다른 것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내 삶에 채워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그러한 것들이 많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내 안에 채워야 할 나의 영적 도전이자 나의 삶의 도전이 되어져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렇게 날 사랑하심을 베드로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2. 더 사랑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어떠한 모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 가운데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인 사랑이 예수님의 단 하나의 조건이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묵상을 해야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의 틀은 여태까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의 틀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네 사랑합니다 / 그럼 내 양을 먹이라’ 지금 말씀은 그런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새로운 틀입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말씀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 네, 사랑합니다 / 그럼 내가 너에게 복 주겠다’ 이러한 것이 지금까지의 말씀의 틀입니다. 구약에서의 모든 말씀의 틀은 그렇습니다. ‘니가 나를 잘 믿고, 니가 나를 잘 섬기면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내가 너를 잘 되게 하겠다’라는 것입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니가 나를 버리고 다른 이방신을 섬기면 내가 너를 버리겠다’ 이런 것이 말씀의 기본적인 틀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조건으로 끝인 것 같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후로부터 사랑은 조건이자 그 자체가 완성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면 그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면 영생은 우리에게 지옥입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더 누리고 더 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 대한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물질을 얻는다면 우리는 그 물질에 깔려서 어려움만 겪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충만함 없이 우리가 건강을 얻는다면 그 건강은 죄로 우리를 달려가게 하는 힘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 없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힘써서 이루었던 모든 관계들은 결국 나의 짐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조건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 오늘 말씀의 뒤를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니가 젊어서는 니 마음대로 다녔지만 나이 먹으면 띠가 띠어져서 다닐 것이다’ 그렇게 얘기해 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요한을 보면서 묻습니다. “예수님, 저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이 너랑 무슨 상관이냐?’ 라고 좋게 얘기하셨지만 예수님 말씀은 ‘너는 내 사랑으로 네게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너를 위한 사랑과는 관계없다는 겁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는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을 가지고 나를 따르면 된다. 그것만 있으면 충분하다. 요한이 어떤 것을 받았든지 거기에 네가 부러워하거나 또 어떤 마음의 영향을 받을 필요는 없다’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한 하나님 사랑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게 합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고, 내 안에 하늘로부터 오는 평안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또다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기쁨과 감격함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날 사랑하심에 감사해서 더 사랑함으로 쓰임 받는’ 건강한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날 사랑하심에 우리도 더 사랑함으로 주님 앞으로 모두 나오셔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