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설교본문 : 요한복음 11장 25절 ~ 26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2년 04월 17일
설교요약 :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대해 의문의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 감탄의 느낌표(!)를 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예수님의 시체에 향을 바르러 왔던 사람들이 그의 무덤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을 발견한 것은 사실입니다. 무덤이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설명 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들과 로마인, 당대의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 주님의 시체를 어디서든지 발견해 낼 수 있었다면 부활을 전하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증거를 매우 쉽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①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소였음에도 당대로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②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보고 확신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일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많이 목격되었습니다. ③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이 급변했습니다. 부활을 경험하기 전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실망과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뒤로 그들은 모두 남은 인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중에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까?
1.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유명한 사건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죽었던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던 그 사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주신 많은 사건들을 적어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신 사건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정수와도 같은 사건이 바로 오늘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이전에도 또 구약에서도 죽은 사람을 살린 사건들은 더러 있었습니다. 사무엘도 그랬고 엘리사도 그랬고 또 사도 바울도 유두고라는 청년이 죽었을 때 다시 살려낸 그런 사건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전에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보다도 이 사건이 매우 특별한 이유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이후에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4일이나 지난 시신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다 그냥 쉽고 편하게 내가 이해하는 만큼만 믿는 그 틀 안에서 믿음이 갇혀버릴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틀을 깨트려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 부활의 생명에 대해서 이러한 설명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부활이고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산다’는 말은 부활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영생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적은 우리의 영생이고, 부활과 영생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2.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이 땅에서 사는 것을 길게 사는 그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는 그 죽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생명의 연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틀을 깨뜨리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핵심은, ‘내 능력이 이만큼 더 크다’라는 것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너희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틀을 깨뜨려라’는 예수님의 영생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만큼, 아는 만큼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 ‘내 믿음의 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깨뜨려주심이 바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이 아닙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나사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아닙니다. 유두고 청년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됩니까? 그 부활은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의 경계의 모든 틀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생명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틀에서 삶과 죽음, 영생과 부활을 다 이해하려고 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틀을 깨뜨려 주십니다. 예를 들어, 예배는 예배가 목적이 될 때에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내 삶의 이유가 될 때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되는 겁니다. 예배가 내 호흡의 이유가 될 때 그것이 참된 예배가 되는 겁니다. 예배가 내게 생명이 되어야 됩니다. 예배를 드림으로 더 받고, 누리고, 사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가 사는 거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내가 죽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믿음과 신앙으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예배가 내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적용 : 우리 앞에서 믿었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예배가 어떠했습니까? 처음부터 예배드려서 복을 받자고 예배드린 분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배는 이 땅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고통을 의미하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배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배가 목숨이고 생명이고 영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그 순간 내가 영생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는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멈추게 되는 것이 내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세상에서 총과 칼로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여기서 내 호흡을 멈출지라도 내 호흡은 계속되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사고와 모든 기준들이 깨트려지는 그 위에 있는 영원한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인간적인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틀로 우리가 믿으려고 애써야 합니다(성경대로). 하나님의 틀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내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예배자, 기도자, 전도자로 살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이고, 예배, 기도, 전도 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배, 기도, 전도가 나의 생명의 나타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예배를 드릴 때 나는 살아있는 것이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십자가를 통과한 부활신앙의 감격을 통해 나의 세상적인 틀을 점점 깨뜨리고 ‘부활이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삶의 목적과 이유가 되시는 찾은 이가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