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즐겨 드나들 수 있는 교회
설교본문 : 사도행전 11장 24절 ~ 26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1년 10월 24일
설교요약 :
안디옥교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얻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신, 그리스도의 종 또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특별한 삶의 모습, 특별한 성격을 바라보면서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어준 매우 영광스러운 별명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11장 26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말 바로 앞에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일 년 동안 머물면서 가르쳤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렇게 가르쳤더니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림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은 바나바와 사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친 결과로 얻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1. 드나들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우리 교회들이 이웃들과 세상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이 본문을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당시 사회적인 정황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대부분 세상과 담을 쌓고 폐쇄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상황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에는 성전에서 모였는데, 그곳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지 않는 많은 유대교인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한쪽 구석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갑작스럽게 숫자가 늘어난 하나의 작은 종파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예배 현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유대인들에게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보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땠을까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당 같은 곳을 빌려서 썼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다른 사람들도 왕래가 있는 곳입니다. 빨간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들어오기 부담스러운 곳이 아니라 누구나 왔다 갔다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공간에서 바나바와 사울이 일 년 동안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로 인해 안디옥 교회 사람들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2. 공동체에 나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들은 누구보다도 공동체가 속한 가족들이 즐겨 드나드는 공동체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예배에 나오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곳에 오면 우리의 여러 가지 필요가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적인 필요가 채워집니다. 주일 예배에 오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반 정도는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아직도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물론 평생을 그렇게 산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이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인 것 같고,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 같지 않았는데, 함께 예배드리는 가운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나를 가치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다시 듣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놀라운 뜻을 가지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 속에 있는 영적인 필요 뿐 아니라 정신적인 필요가 채워집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교회 공동체 속에서 서로 존중해 주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속에 있었던 열등감들이 치유됩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미워하고 소외시키는, 아직 세상에서 하던 버릇을 못 고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으면 상처가 두 배가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서로를 품고 섬기고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3. 사회적 약자를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사회적 약자들이 즐겨 드나드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큽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아예 벽을 없애 버리고 건물을 짓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는 학교와 건물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처럼 구조적으로라도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들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가 애를 써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이웃들의 필요를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살피고 그들을 어떻게 도울지 협의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가지고 우리가 머무는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계속 찾아야 합니다. 공부도 하고 실험도 하면서 우리 이웃들이 쉽게 들락날락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곳을 따라 아이디어들을 모으고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 연구하면서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각 지역에서 모이는 작은 교회인 목장이 우리가 사는 지역의 이웃들과 함께하면서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교회로 성장하고, 그곳에서 이웃들이 드나들 수 있는 센터들을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이런 꿈을 가진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이 지역에 필요한 모습으로 곳곳에 이런 들락날락 센터를 만들어나갈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적용 : 이런 급진적인 나눔의 삶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이렇게 비범한 헌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교육 수준이 더 좋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에게는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라는 말의 역동성, 혁명성을 잃어버렸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그들은 메시아의 나라가 임한 것을 믿었고 이제 곧 그 메시아가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오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잠깐 있다가 끝나는 삶이라는 것을 정말 믿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으로 그 이후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말 믿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그 이후의 삶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고,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 그림자 밑에서 살아가는 것을 정말 믿었습니다. 메시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믿었기에, 영원히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위해 이 땅에 있는 것을 절약하고 그것을 이웃들과 나누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면 밖으로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점점 당연해질 것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