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제목 : 만나를 먹여주신 의미
설교본문 : 신명기 8장 12절 ~ 16절
설 교 자 : 한승엽 목사
설교일자 : 2025년 10월 26일
설교영상 :
설교요약 :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언제나 결핍(배고픔)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 귀에 조용히 속삭이십니다. “너는 떡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너를 말씀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이다.” 오늘 우리는 “만나를 먹여주신 의미”를 듣고, 광야를 은혜로, 가나안을 사명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쓰임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들에게 만나를 먹여주신 의미는 무엇인가요?
1. 광야의 은혜입니다.
1) 낮추심의 은혜입니다. 결핍 속에서 배우는 신뢰 : 하나님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신 8:3) 하나님은 그 백성에서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결핍은 징벌이 아니라 축복으로의 초대였습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낮아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신뢰가 자랍니다. 애굽에서 익힌 생존의 기술로는 광야를 건널 수 없습니다. 광야는 계산으로 이기는 곳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으로 건너는 곳입니다.
2) 매일의 은혜입니다. 하루 분량의 길, 하루 분량의 만나를 하나님은 먹여 주십니다. 만나는 “날마다” 내렸고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둘지니라”(출 16:16) 하셨습니다. 어제의 은혜는 어제의 양식입니다. 오늘의 길에는 오늘의 은혜가 내립니다. 많이 거둔다고 남지 않고, 적게 거둔다고 모자라지 않았습니다(출 16:18). 하나님은 우리를 “일용할 양식”으로 훈련하십니다.
3) 말씀으로 사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 “사람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가르치셨습니다(신 8:3). 우리의 마음이 굶주릴 때, 하나님은 먼저 귀를 먹이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길이 보이고, 순종할 때 길이 됩니다. 광야는 길이 없는 곳이지만, 말씀을 붙들면 우리의 발걸음이 믿음의 길이 나게 합니다.
4)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먹여주신 만나와 함께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목마를 때 반석의 물(출 13:21, 17:6).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방식으로 동행을 보이셨습니다. 광야의 기적은 ‘하루하루’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매일의 기적을 기대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씀을 듣고 복된 말씨로 증언해야 합니다.
5) 광야의 결론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품격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은 급할수록 더 천천히, 배고플수록 더 감사하며, 막힐수록 더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는 예비한 시간표가 있다.”는 말씀이 가슴에 새겨질 때, 우리는 품격을 잃지 않습니다. 혈기를 부리지 않고, 사람을 품고, 바르게, 따뜻하게 살아낼 수 있게 됩니다.
2. 가나안의 사명입니다.
1) 방식의 전환입니다. 가나안의 만나는 광야의 기적에서 경작으로 새로워집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이제 만나가 그쳤습니다(수 5:12). 이제는 씨를 뿌리고, 뿌린 만큼 거두는 질서 속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달라지신 것은 아닙니다. 공급의 방식이 바뀌었을 뿐, 주권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광야는 ‘매일 공급’으로 훈련했고, 가나안은 ‘매일 경작’으로 사명을 감당합니다. 광야에서 받은 은혜는 가나안에서 ‘거룩한 책임’으로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최대의 위험은 형통 속의 망각입니다. 모세는 경고합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풍족은 감사의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방심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큰 시험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을 놓친 형통입니다.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신 8:17)라는 속삭임이 우리 영혼을 세상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돈, 인정, 편안함, 게으름 등으로 인해 광야에서 외치던 “오직 주님”이 가나안에서는 “오직 나”로 변질되지 않도록,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가나안의 정의는 ‘더 좋은 곳’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신 자리’입니다. 가나안은 애굽보다 편해서 좋은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이기 때문에 좋은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헤브론은 풍요보다 순종으로 빛났습니다(창 12:5).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 하나님이 머물라 하신 관계,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 그 자체가 우리의 가나안입니다. 소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내 삶에 보여지느냐가 기준입니다.
4) 가나안의 사명의 내용은 말씀에 순종을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면 그 땅을 누리고, 불순종하면 땅이 토해낸다”(레 18:24–28)는 거룩한 질서를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이 메시지를 보여주는 공동체입니다. 기근의 때에도, 형통의 때에도, 우리는 ‘말씀대로’라는 간단하지만 결정적인 성경적인 교회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 공동체의 자리, 사역 참여의 자리가 가나안에서 우리가 붙들 사명입니다.
5) 가나안에서도 광야처럼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형편이 나아졌다고 기도의 무릎이 느슨해지면, 곧 영혼이 메마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광야의 은혜를 가나안에서도 기억하고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용 : 우리는 광야의 은혜를 기억하고 가나안의 사명을 붙잡고 생명을 살리고 사람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새벽에 말씀을 펼치고,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매주 감사를 기록하여 창고가 아니라 ‘기억’에 쌓아갑니다. 매달 재정과 시간을 점검해 ‘첫 것(첫 시간/첫 열매/첫 사랑)’을 주께 드립니다. 매사에 관계와 선택에서 “말씀대로라면?”을 먼저 여쭈어서 행해야 합니다. 이 말씀대로의 신앙이 우리를 지켜 줍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먹이신 이유는, 우리를 ‘말씀으로 사는 자’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그 말씀으로 하루를 버티게 하시고, 가나안에서는 그 말씀으로 우리 삶을을 경작하게 하십니다. 광야의 은혜를 기억하고 가나안의 사명을 붙잡고 이번 한주간 전교인 특새를 통해 주님께서 날마다 일용할 만나를 먹여주심으로 전무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